본문 바로가기
독서/독서법

[책 요약] 동아시아 전통은 글을 어떻게 읽었는가

by For Your Life 2020. 1. 16.
반응형

출처: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편. 2006. 『읽기』. 서강대학교출판부.

 

[평가] 

 

종교를 금지한 공자의 유학을 유대교 및 기독교과 비교한다는 점에서 설명에 문제가 꽤 있다. 도교와 불교와의 대응 속에서 나타난 주자학이 유학을 대표하는 것마냥 서술하고 있어 동의하기 어렵다. 동아시아 전통을 논하기 위해서라면 주자보다는 공자부터 시작하여 다른 유학자들을 살펴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요약]

강영안. 2002. "동아시아 전통은 글을 어떻게 읽었는가?". 『인간의 얼굴을 가진 지식』. 소나무.

 

1. 들어가는 말

 

주자는 “책 속에 어떤 것인들 없겠는가(書中何所不有)”라 말한다. 유학은 책을 중심으로 형성된 전통이다. 공자의 6경.

 경전(經典)이 있고, 그에 대한 주석(註釋)이 있으며, 다시 주석을 연구한 책이 존재한다. 이처럼 책을 무엇보다 중시했다는 점에서 유학은 유대교 및 기독교와 가깝다고 할 것이다.

 

 이처럼 책이 있는 곳에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하는 논의는 자연스럽게 뒤따를 수밖에 없다. 유학의 독서론은 한(漢)대의 훈고학을 거쳐 송(宋)대 주자에 이르러 비로소 그 정치(精緻)한 정교(精巧)하고 치밀(緻密)한. 모습을 드러낸다. 참고로 『성서』 읽기와 해석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성서』가 형성된 뒤 350여 년 뒤인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해 이루어진다.

 

 주자의 독서론은 『주자어류(朱子語類)』 10권과 11권 「독서법(讀書法)」 上과 下로 묶어둔 어록에 담겨 있다. 「독서법(讀書法)」 上은 100조목이며, 下는 145조목이다.

 

이 글에서는 우선 ‘무엇을 왜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통해 주자의 ‘독서의 현상학’을 찾아보고자 한다. 다음으로는 독서의 윤리에 대해 검토한다. 마지막으로는 실제로 책을 읽을 때 어떠한 규칙을 실천적으로 염두(念頭)에 둘 것인지에 대한 물음을 주자에게 던져 볼 것이다.

 

2. 무엇을, 왜 읽을 것인가?: 독서의 현상학

 

논의에 앞서 책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책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일상적인 물건과 마찬가지로 일정한 모양과 성질을 갖고 있다. 그러나 책은 다른 사물과 달리 문자로 쓰여 있고, 문자를 아는 사람은 읽을 수 있는 물건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따라서 책은 써야 하고 읽어야 한다. 그리고 쓰는 일과 읽는 일 사이에는 인쇄, 유통, 판매, 구입의 과정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책은 쓰는 것에서 시작하여 읽는 데 이르기까지의 全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하나의 문화적 구성물이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다. 첫째, 쓰기와 읽기 중에서 언제나 읽기가 쓰기보다 선행한다는 것이다. 둘째, 쓰기와 읽기 사이에 문자가 매개(媒介)되어 있다는 점이다.

 

우선, 읽기의 선행성에 대해 생각해보자. 들을 수 없는 사람은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아무것도 읽지 않은 사람은 아무것도 쓸 수 없다. 읽기의 수동성이 쓰기의 능동성에 앞선다. 그러나 읽기가 마냥 수동적인 것은 아니다. 글을 읽을 때 우리의 눈은 반복해서 움직이면서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을 이어서 읽으며, 우리의 의식도 눈의 움직임과 마찬가지로 순차적으로 활동한다. 따라서 읽는 행위는 지금 보고 있는 단어와 문장을 포착하는 행위, 앞에서 읽은 단어와 문장을 간직하는 행위, 뒤따라올 단어와 문장에 대해 예상하고 기대하는 행위를 통합한 하나의 종합적‧능동적 행위다. 즉, 읽기는 수동성 가운데 형성되는 능동성이라 할 수 있다. 주자의 독서론은 읽기의 이러한 성격을 고려한 독서론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읽기와 쓰기를 매개하는 문자에 대해 생각해보자. 문자는 다른 것과 구별되면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물을 가리키는 기호(記號)다. 즉, 문자의 외형적 속성은 다른 것과 구별된다는 차이성이며, 문자의 내재적 속성은 타자를 지칭한다는 사실이다. 

 

주자는 사람이면 누구나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배움에는 똑똑함과 우매함, 큼과 작음, 고귀함과 비천함의 구별이 없다. 서책(書冊)이 없더라도 인간은 마땅한 도리를 배워 알아야 하는데, 지금은 서책이 있으니 더욱 마땅히 그것을 배워야 한다(10:4). 주자가 염두에 둔 서책은 성현들의 경서(經書)다. 즉, 성인이 되려면 성인의 글을 읽어야 한다. 육경(六經) 속에 담긴 성인의 글은 사사로운 의견이나 감정 표현이 아니라 참된 삶의 길을 보여준 것이다. 성인의 글을 읽고 이치를 밝힌 다음에는 법가 계통의 책이나 역사서를 읽어도 무방(無妨)하다.

 

이제 “왜 읽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주자에게 던져보자. 우리는 이미 배워야 하기 때문이라는 답을 찾아냈다. 그렇다면 “왜 배워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주자는 어떻게 대답할까? 아마도 주자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우리가 아직 성인(聖人)이 아니기 때문에 배워야 한다.” 따라서 배우는 것이 곧 읽는 것이라면 “우리가 아직 성인이 아니기 때문에 읽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유학의 기본 텍스트인 경서는 나의 존재를 비춰볼 수 있는 하나의 거울이다. 이 거울을 통해 자신이 성인이 아님을 알 수 있고, 성인이 되고자 하는 무한한 욕망이 생겨나 이를 바탕으로 비로소 끈질긴 공부를 시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경서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알 수 있다.

 

그런데 주자는 독서법을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책을 읽는 것은 배우는 사람의 두 번째 일이다.” 이는 도덕적 실천이 우선이고 글 공부를 통한 지식이 그 뒤에 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이것이 독서가 불필요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유학 전통에 따르면 참된 본성, 참된 이치는 누구에게나 이미 갖춰져 있지만, 갖춰진 도리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독서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주자는 ‘자기 자신에게 절실할 것’을 글을 읽는 사람에게 끊임없이 요구한다. 독서를 하되, 항상 자신과 관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우리는 ‘주체적 글 읽기’라 할 수 있다. 위인지학(爲人之學,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부)이 아니라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추구해야 한다는 유학 정신을 잘 보여주는 독서론인 셈이다. 자기 자신의 절실한 문제와 관련하여 독서하고, 독서를 통해 도리를 투철(透徹)하게 획득해야 한다는 것을 주자는 누누이 강조한다(10:3; 10:5). 요컨대, 독서는 ‘마음을 기르는 방법’, 즉 양심지법(良心之法)이다.

 

 

3. 어떻게 읽을 것인가?: 독서의 윤리

 

독서의 목적이 ‘마음을 수양하는 방법’이라면, 독서 방법 역시 마음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주자는 올바른 독서법에 있어서 마음과 관련한 내용을 강조한다.

 

마음을 비우는 독서

 

주자는 읽기 위해서는 마음을 비워(허심(虛心)) 편안하게 하는 것(평심(平心))을 준비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우선 “마음이 책 위에 있도록 하는 것”이며, 이는 읽고 있는 책 자체에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한편,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세워서는 안 되는 것”이기도 하다. 즉, ‘독자의 의도(intentio lectoris)’가 아니라 ‘작품의 의도(intentio operis)’가 중요하다. 선입견을 없애고 본문의 뜻에 집중해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마음을 비우는 것의 세 번째 의미는 ‘공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자는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거나 사사(私事)로운 뜻을 내세우지 말고, 글에서 말하고 있는 도리의 옳고 그름만을 살피도록 권유한다.

 

글과 마음과 몸이 일체가 되는 체인(體認)의 독서

 

주자의 독서법은 마음을 강조한다. 바른 이치를 깨닫는 것이 독서의 궁극적인 목적인데, 마음을 통하지 않고서는 바른 이치를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주자의 독서법이 몸을 배제(排除)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몸을 적극적으로 개입시킨다. 바른 이치를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삶을 통해 실천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이때의 몸은 구체적, 일상적인 삶 전체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여기에는 책을 읽을 때의 몸가짐에 대한 내용도 포함된다. 따라서 주자는 “배우는 사람이 책을 읽을 때는 반드시 몸을 모아서 바르게 앉고, 느긋하게 보면서 나직하게 읊으며, 마음을 비워서 [그 안에] 젖어들고, 자기 자신에게 절실하게 성찰해야 한다.”라고 가르친다. 앉기, 시선, 마음가짐 모든 것이 독서에 중요하다는 것이다. 주자의 독서법은 한마디로 ‘온몸으로 읽기’라 할 수 있다. 이를 주자는 ‘체인(體認)’, 즉 몸으로 터득하기라 부른다. 그렇다면 체인의 독서법은 어떻게 가능한가?

 

숙독(熟讀)과 열독(熱讀), 서두르지 않기와 읽으면서 생각하기

 

주자는 책을 우선 숙독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무르익도록’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자는 천천히 오랫동안 독서를 함으로써 독서가 정밀해지고 싶어져서 이치가 절로 이해된다고 말하고 있다.

 

두 번째 방법은 열독, 즉 ‘깊이 읽기’다. 글을 깊이 읽기 위해서는 성인의 언어를 드러난 것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감추어진 부분을 한 겹씩 파고들어가야 한다. 따라서 무엇보다 반복해서 많이 읽을 필요가 있다. 마음을 집중해서 몸으로 반복하여 읽어낼 때 비로소 글의 뜻을 깨달아 한 몸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숙독과 열독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서둘러서는 안 된다. 느긋이 읽기 위해서는 자신을 세워나가는 것, 즉 위기(爲己) 말고는 다른 욕심―예를 들어 책을 끝까지 읽고 말겠다는 태도―이 없어야 한다.

 

숙독과 열독을 위해 두 번째로 중요한 태도는 생각하면서 읽는 것이다. 읽기만 해서는 안 되며, 읽기와 생각이 함께 가야 한다. 주자는 “책을 읽는 방법은 한 번 읽고 나서 다시 한 번 생각하며, 한 번 생각하고 다시 한 번 읽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야만 한 편의 책과 자기 자신이 하나로 일체를 이룰 수 있다.

 

 

4. 독서할 때 필요한 실천적 규칙들

 

한 권의 책은 하나의 [완결된] 전체를 이루고 있고, 전체는 다시 부분들―문단, 문장,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주자는 낱말에서 문장으로, 문장에서 전체로 옮아갈 수 있는 규칙을 명시적으로 제시해주고 있지는 않지만, 주자의 말을 통해 이를 구성해볼 수 있다.

 

주자는 무엇보다도 “쉬운 것부터 먼저 읽어라.”라고 충고하면서 어려운 것부터 읽으려는 사람들의 병폐(病弊, 병통(病痛)과 폐단(弊端))를 지적한다. 먼저 쉬운 것부터 읽고, 단계적으로 익혀 나가면 아무리 어려운 글이라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순서’를 따른다는 것이다.

 

둘째, 주자는 “오직 본문을 중시하라.”라고 말한다. 즉, 본문 자체를 먼저 숙독하고 본문을 통해서 의미를 파악하려는 노력을 한 다음,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으면 주석을 참고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의 말 가운데 이해하기 힘든 말이 있을 때는 ‘작문(作文)’을 시도해서는 안 되며, 본문 자체가 자신에게 스며들어 완전히 습득(習得)되기까지 기다리라고 충고한다.

 

셋째, 주자는 “문맥을 중시하라.”라는 규칙을 제시한다. 단어나 글자 하나하나가 소중한 것은 맞지만, 그것들은 모두 다른 문장과 상황, 맥락(脈絡)에 따라 그 의미가 달리 결정되기 때문이다.

 

넷째,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을 찾아야 한다. 먼저 전체를 관통하는 곳을 이해한 다음, 각 내용이 모두 핵심에 닿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자는 이를 소 잡는 사람이 뼈를 가르고 살을 발라내는 일(10:15)이나, 실로 꿰맨 자리를 찾아 그 전체를 해체하는 일(10:13)에 비유한다. 

 

따라서 글을 읽을 때는 전체와 부분을 조목조목 보아야 하고, 깊이 보고, 깊이 생각해야 한다.

 

5. 성찰적 독서와 독서의 무사도(武士道)

 

[앞에서 언급했듯이] 주자는 “배우는 사람이 책을 읽을 때는 반드시 몸을 모아서 바르게 앉고, 느긋하게 보면서 나직하게 읊으며, 마음을 비워서 [그 안에] 젖어들고, 자기 자신에게 절실하게 성찰해야 한다.”라고 가르친다. 여기서 우리는 인문학도(人文學徒)가 가져야 할 성찰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자기 자신에게 절실하고, 자기 생각에 대해 괄호를 치며, 성인의 글에 자신을 완전히 쏟아 붓는 태도가 그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못지않게 성찰적인 태도가 바로 글을 읽을 때 의문을 갖는 태도다. 주자는 글을 읽을 때 깊이 생각하면서 읽어야 하지만, 동시에 의문을 품는 것을 그쳐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10:55; 10:64). 자기 자신의 생각을 포함하여 의문을 품어야만 진정한 진전이 있다는 것이다.

 

주자는 글에 깊이 젖어 읽을 때 자연스럽게 의심이 생긴다고 본다. 그러므로 공부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의심에서 출발해서는 안 되며, 깊이 읽어 익숙해진 다음 의문을 가질 수 있고, 그 의문을 가지고 씨름할 때 비로소 공부에 있어서 진전이 있을 있다는 것이다.

 

의심을 가지고 자신을 돌아보는 것을 인문적 태도라 한다면, 글 읽는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해 주자가 그리고 있는 모습은 다분히 무사(武士)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글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은 싸움과 같이 해야 한다. 적을 찌를 때와 마찬가지로 단번에 끝을 내고자 하는 마음 자세를 또한 가져야 한다. 주자의 이러한 말들은 깨달음을 향해 용맹정진하는 수도자(修道者)처럼, 칼을 눈앞에 두고 싸우는 무사처럼, 글 읽는 사람 또한 단단한 각오(覺悟)와 정신을 가지고 글을 읽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6. 글과 마음과 몸이 하나 된 글 읽기

 

앞에서 언급한 대로 주자는 책을 거부하거나 반대로 책만을 숭상(崇尙)하는 양쪽의 극단적 태도를 모두 비판하면서, 자신을 세우는 위기지학의 일환으로서의 독서법을 확립한다. 주자의 독서론은 나에게 절실한 문제를 가지고 나를 바로 세우기 위한 목적에 핵심이 있으므로 ‘나’가 빠진 독서는 있을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독서는 결국 남에게 보이기 위해 하는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중략)

 

그런데 주자에게는 해석상의 난점이나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없다. 난해한 구절을 만난 경우에는 “우선 마음을 비우고, [본문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라고 말하거나, “성현(聖賢, 성인과 현인)의 말씀은 대부분 사람들과 대화한 것”이므로 결코 난해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정도다(11:33). 그러므로 주자는 글과 마음과 몸의 일체를 얻어낼 때까지 끊임없이 반복해서 무르익도록 읽는 것을 권한다. 이는 서양 최초의 해석학 교본이라 할 수 있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리스도교 교양』에서 언어의 애매성과 모호성, 직접적 의미와 간접적‧상징적(象徵的) 의미, 비유(比喩)법 등의 문제를 다루는 것과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듯 사랑이야말로 󰡔성서󰡕의 혼이요 목표라 한다면, 사랑을 우리 속에서 일구어낼 수 있는 『성서』 읽기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법보다는 오히려 주자가 권하는 독서법을 실천함으로써 훨씬 더 유효하게 이뤄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주자의 독서법은 객관적 진리를 발견하는 데는 부족할지 몰라도, 일상적 삶 가운데서 나를 만들어가는 성찰적 자세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반응형

'독서 > 독서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 요약] 단단한 독서 (일부 요약)  (0) 2020.01.23
[책 요약] 인문계 텍스트의 독서론  (0) 2020.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