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 사이에 수능이 끝나고 나면 신문기사나 유튜브 등에 '미국인/영국인도 수능 영어 문제를 잘 못 푼다'는 글이나 영상이 올라오는 것이 눈에 띈다.
작년에는 수능 국어영역 문제가 너무 어려워서 '국어교사도 풀지 못했다'는 기사가 유행하기도 했다.
국어영역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우선 수능 영어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1. '외국인(원어민)도 수능 영어를 잘 못 푼다'는 말의 함정
일단 외국인(원어민: 미국인, 영국인 등)이 수능 영어를 푸는 것이 '객관적'이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a. 표본의 숫자가 충분해야 한다
- 대부분의 신문기사나 영상을 보면, 몇 명의 원어민(주로 자신과 친분이 있는 지인)을 대상으로 수능 문제를 풀어보게끔 한다. 당연하지만, 처음부터 설계가 잘못 되어 있고 결과도 믿기 어렵다.
b. 대상의 특성이 적합해야 한다
- 표본의 숫자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들이 '수능', 즉 대학수학능력 시험에 적합한지에 대한 평가가 필요하다. 한국인도 따로 공부하지 않고 KBS '우리말 겨루기'에 나오는 문제를 풀라고 하면 많이 틀리는 것처럼, 영국인이나 미국인이라고 해서 영문법이나 독해 능력이 담보된다고 할 수는 없다.
흔히 원어민들이 하는 이야기 중 하나가 '나(우리)는 그런 표현을 쓰지 않는다'인데, 많은 경우 이는 그들이 영문법이나 고급 독해를 별도로 공부한 적이 없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Oxford, Cambridge, Collins 영문법 책에 나오는 문장이나, 학부생 이상 수준의 원서에 나오는 문장을 충분히 읽어낼 수 있어야 '대학수학능력'이 있다고 친다면, 상당수의 외국인이 해당 조건에서 배제될 가능성이 높다.
만약 교육과정에 문제가 있다면 독해, 문법, 어휘, 회화, 작문 등의 영역 간의 비중에 대한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는 데 있을 것이다.
2. '국어교사도 수능 국어를 잘 못 푼다'는 말의 함정
국어교사는 국어를 가르치는 사람이기 때문에 외국인의 경우보다는 조금 더 객관성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막상 '국어교사'라는 집단의 구성원들이 그렇게 동질적이지 않을 수 있다.
우선, 퇴임을 앞둔 60대 초반의 교사에서부터 이제 막 교사 생활을 시작한 젊은 교사에 이르기까지 연령대가 매우 다양하다.
이들은 서로 다른 초중고 및 대학 교육과정을 거쳤다.
또한, 이들 국어교사들 간의 역량 편차도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 지속적으로 자기계발과 교수 연구를 하는 교사가 있는 반면, 일단 임용된 다음부터는 별다른 노력 없이 반복적, 습관적으로 (너무 오래된 설명이나 심지어 틀린 내용을) 가르치는 교사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즉, '국어교사'라는 '타이틀'이 그 사람의 '국어 실력', 특히 '대학에서의 수학 능력'을 담보해 주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국어교사가 수능 국어를 잘 못 푼다'는 문장 하나만으로 수능을 비난할 수는 없다.
결국 중요한 문제는 '대학수학능력'이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부재하다는 데 있다.
각 대학마다 인재상이 다르고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능력에도 차이가 존재할 수 있지만, 현행 수능 체제에서는 불가피하게 일률적인 기준을 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행 수능이 '어렵다'는 이야기는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한다. 만약 대학에서 요구되는 수학능력이 지금보다 높아야 한다면 문제는 더 어려워질 수도 있고, 시험과목도 충분히 더 늘어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서울대의 경우 수능 선택제가 도입되어 학생들이 물리학 등을 고등학교에서 이수하지 않고 입학함에 따라 이공계 신입생 중 상당수가 수학 및 과학 실력이 낮아지자,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정상적으로' 이수한 신입생들에게 기초수학 및 과학을 처음부터 다시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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